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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홀의 밝은 조명에 눈이 아파서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가 나는 쪽을 관찰했다. 이것이 노안이라는 것인가, 필요할 때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저 사람이랑 얘기만 좀 하면 돼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시연을 마주 보고 서 있던 재원도 그쪽을 보았다.

깨끗하지만 새것은 아닌 옷을 입은 한 젊은 여자가 멀끔한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둘과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시연은 왜 그러냐고, 저 사람이 말하게 그냥 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실은,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경호원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자의 머리 스타일은 시연이 공연 때 택했던 것과 너무 흡사했다. 산발 말이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밖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이 사람은 한껏 차려입은 손님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너무나 튀는 존재였다.

이때 여자가 재원을 발견했다.



“너.”



여자가 말했다.

시연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다만 시연의 시선이 그 여자를 향해 있었으며, 따라서 여자가 손가락으로 이재원을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입이 저런 모양으로 벌어지는 것은 ‘너’라고 말해서 그러는 거겠거니, 해서였다.

만약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거나, 말을 하고 있었거나 듣는 중이었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여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시연의 물음에도 재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연은 그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얼굴이 아까부터 귀찮은 검은 안개에 휩싸인 상태라서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눈알도 흘끗거리고 있지 않았다.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한곳을 응시하고 있어서였다.

한편 여자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너!”



그래. 이제는 좀 더 힘 있어진 저 목소리에 담긴 감정도 분명했다.

이건 증오였다.



재원이 말했다.

“미친 사람인가 봐요.”



표정을 보지 않아도 시연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목소리가 너무 차분했다. 아무리 이재원이 급격하게 유명해진 탓에 최근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지만 (인플루언스란 유리한 관심도, 불리한 관심도 끌어당기는 성향이 있었으니까) 정말로 미친 여자가 자기를 손가락질하면서 소리 지르는 상황이라고 여겼더라면 좀 더 당황한 톤이었을 것 같았다.



“네가 한 계약이 내 남편이랑 한 거지 나랑 한 건 줄 알아!”



여자가 이렇게까지 소리를 지르자, 이제 이벤트홀에 남아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이재원을 번갈아 흘끗거렸다.



“강제 계약이었어. 무효야! 무효라고!”

“이 아줌마 이거 안 되겠네.”



경호원들 중 하나가 여자를 붙잡고 있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무전기에 대고 뭐라뭐라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곧이어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더 많은 경호원들이 이벤트홀 입구에 나타났다.

그냥 가면 안 되는데.

저 여자는 마치 시연 보고 들으라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아까 싱싱물산 사모가 급히 자리를 뜬 것이 수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지가 산 시연의 그림을 갖고 유세를 떨려고 시연을 기다리고 있을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러지 않은 건, 저 미친 여자가 올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근데 알았대도, 그게 왜 신경 쓰일까? 저 여자는 계약 얘기를 하던데, 싱싱물산 사모가 엮여 있나?



물론, 누군가가 싱싱물산 사모든 이재원이든 다른 유명인이든, 타인에게 혐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서 될 일은 아니었다. 혐의를 제기하는 자가 마녀든, 저 여자든. 그런 혐의가 맞을 때도 있기는 했지만, 늘 맞는 건 아니었다. 시연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역시 유명한 애들은 다 나빠’라는 식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있었는데, 시연은 그게 참으로 웃기다고 생각했다.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아무것도 하는 건 없으면서 있는 놈한테 빌붙는 자가 있다고 해서 ‘없는 애들은 다 나빠’라고 하는 건 말이 되는가? 당연히 안 된다.

뭔가를 가진 자들 중에는—그것이 부든, 명예든, 인기든—그것을 치사한 방법으로 갖게 된 자들이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들 중에는 그걸 선함의 증거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시연이 보기에는 둘 다 등신이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후자가 더 등신이었다. 뺏길 게 없어서 공격당하지 않는 게 자기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다니.



“너 때문에 죽었어! 너 때문에!”



여자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며 경호원들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이벤트홀에 남아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죽다니. 웅성거리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괜찮아요?”

시연이 재원에게 물었다. 반은 진짜로 궁금해서였고, 반은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그럼요. 저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자기 인생에서 잘못된 건 다 남 탓인 줄 아는 사람들.”



여자 쪽을 보던 이재원은 이제 다시 시연을 마주 보았다. 검은 불길이 그 동작을 따라 휙, 움직였다.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살면 안 되던 일도 풀릴 텐데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 네, 뭐.”

“이재원 씨.”



한 중년 남자였다. 공연 기획에 참여했던 사람.



“우리 팀원들이 사인 좀 받았으면 좋겠다는데, 아니 그게 또 촌스럽다면서 걱정하지 뭡니까?”



남자가 가리키는 쪽에서는 젊은 직원들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이재원은 시연을 두고 갈 구실이 생겨서 기쁜 것 같았다. 표정은 볼 수 없으니 몰라도, 다음에 한 말이 너무 과하게 열정적이라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인 해드려야죠! 그럼, 시연 씨.”

“네.”



시연은 저들에게 이미 한 장씩 사인을 해준 적이 있기에, 해달라고 하지 않는 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중년 남자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시연은 이벤트홀 한쪽 벽에 기대 폰으로 검색을 했다.

이재원.

얼굴을 보여줘!



에라이. 스크롤을 넘기고 넘겨도 스크린을 가득 채웠어야 할 이재원의 얼굴들이 전부 검은 안개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

마녀의 비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시연은 사진은 포기하고 글에 집중했다. 하나같이 미담뿐이었다. 유일하게 ‘나쁜’ 소리는 이런 거였다.



클럽 바디뷰티 CEO 이재원, 그는 비만인 혐오자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이재원이 헬스클럽을 운영하면서 비만인들에게 무료로 회원권을 제공했다는 게 문제라는 사람들을 이 기자는 취재한 것이다. 이들은 왜 뚱뚱한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시끄러웠던 흔적이 인터넷에는 기사라는 형식으로 고스란히 남았던 거다.

미칠 노릇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시연도 이재원의 상황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다. 만약 ‘비만인들’이라는 무리를 그렇게 간단하게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중 몇은 무료 회원권이 싫고 몇은 좋다고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무료 회원권이 좋은 자는 이재원의 오퍼를 받아들이면 되고, 싫은 자는 안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왜 회원권을 공짜로 나눠주느냐며 항의하다니.

물론, 만약 몸무게가 일정량 이상 나가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회원권을 배포하고, 그 회원권을 쓰지 않으면 불이익을 가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거야말로 디스토피아일 거였다. 하지만 이재원은 그런 것도 아닐뿐더러, 그럴 힘도 없고, 그럴 확률조차 없지 않은가?

이재원 같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했다고 항의할 시간에 정치인 뒤를 좀 캐고 다니면 차라리 사회에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치인 뒤를 캐는 건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고, 게다가 유용하기까지 하니, 그런 뒷조사는 하기 싫은 거겠지.

그래, 유용. 유용하기가 싫어서 일부러 이딴 시간 낭비를 하는 거라고밖에는 시연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시연은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이재원과 관련된 계약 얘기, 죽었다는 사람 얘기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까 그 여자가 이재원과 아는 사이이고, 다른 곳에서도 저런 소동을 피웠다면 뭔가 말이 나왔을 텐데……

찾았다.

트위터 대화였다.



—그 일을 발설하면 위약금을 물으라고 했대.

—물으란다고 해서 그냥 물었대?

—아니, 물은 게 아니라, ‘발설하면’ 물게 될 거라고, 강제로 사인하게 했대.

—뭐에?

—아 진짜 말 오지게 못 알아듣네. 그 일을 발설하면 위약금을 물으라는 그 각서에 사인을 했다니까.

—근데 왜 자살을 해.

—돈을 내고서도 어이가 없고 억울해서겠지.

—근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경찰이 조사를 안 했어?

—그 대기업 사모가 이 새끼 애인이라잖아.



대기업이라면…… 싱싱물산?



—참나. 깡패한테 처맞은 것도 억울한데.

—그뿐이냐. 이전 계약서를 무효화했잖아. 깡패한테 처맞아서 무효화한 건데 오히려 각서에 사인까지 시키고.



그러니까. 자살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이재원하고 뭔가 계약을 한 사이였는데. 그 계약을 무효화하겠다고 깡패를 불러서 그 사람을 팼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 폭력적인 무효화 과정에 관해 발설하지 말라는, 발설하면 위약금을 물으라는 각서까지 썼다. 위약금을 물을 형편이 안 되니, 아무것도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억울해서 자살했다?



그리고 그 부인은 이재원을 쫓아와서 ‘네가 죽였다’고 한 거군.

부인일 거라고 시연은 생각했다. 엄마일 수는 없었다. 누나는 아닐 터였다.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이모일 것 같지도 않았다.

저 여자는 이 늦은 시각에 이재원을 확실히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이 공연장을 찾은 거였다.

만약 누가 저런 일을 당해서 자살을 한다면 물론 형제나 부모, 친척도 억울하겠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자란 핏줄이 아니라서 어떻게 보면 서로의 전부일 수 있는 거였다. 기약 없이 밤중에 이리 마구 찾아올 정도로. 다른 누구의 저녁밥을 챙기고, 잠자리를 챙기고, 내일 가져갈 도시락을 챙긴다든가, 집에 들어왔는지를 확인한다든가, 전등을 갈아준다든가, 치킨을 사 온다든가 할 필요 없이.

시대가 시대이니, 저 여자와 자살한 남자는 아마 서로 선택한 상대였을 거였다. 핏줄인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되는 대신, 이 둘은 서로 더 가까워지는 걸 넘어서서 같이 살기로 한 사이였을 거였다. 부모는 자신들보다 먼저 죽고, 자식은 자신들보다 나중에 죽고, 자신들은 비슷한 시기에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결혼했을 거였다.

그런데 아마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아이가 있었더라면 이 밤에 여길 왔을까. 아니면 완전히 자신을 놓아버리면 아이를 두고 여기 올 수도 있는 건가.

아무튼, 방금 검색을 통해 발 담가 본 거대한 인터넷의 바다에서 싱싱물산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재원과 엮인 대기업이 거기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 바닥에선 연애 관계가 어떻게 정리될까? 애인을 공유하기도 하나?

근데 이 얘기가 진짜인가?



뒤쫓아가야 한다. 그래야 시연 본인의 이 미친 상황을 끝내든 끌고 가든 할 수 있었다.



—#—#—#—#—#—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쯤 시연은 헐떡이고 있었다. 불편한 구두에 치마를 입고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진실을 아는 자신에게 그렇게 쉽게 거짓말할 순 없었다.

그저 운동 부족이었다. 아주 큰 문제였다. 살기 위해 운동해야 한다는 걸 깨달을 만도 한 나이였는데도 아직 충분히 괴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러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건강이 한 번 무너져 봐야 정신을 차리고 평소에도 관리를 하지.

쑤시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고 작은 극장이 모여 있는 곳이라서 건물 앞의 보행자 전용 거리는 밝았다. 가로등도 있었고, 커다란 건물 창에서 쏟아져나오는 빛도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었고, 태풍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맑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까 그 여자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흔들의자가 아닌데도 여자가 양팔로 자신을 껴안고 앞뒤로 움직이는 바람에, 마치 흔들의자처럼 보였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여자가 앉은 그곳을 멀리 돌아갔다.

시연은 길을 가로질러 곧장 그리로 갔다.



“저기요.”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기요?”



마침내 고개를 들자, 생각보다 차분하고 다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꼭 봐야 하는 얼굴이 보이자 시연은 마음이 놓였다. 이재원의 경우에는 표정이 너무 궁금한데 볼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짜증이 쌓여 있었던 것 같았다. 반면 이 여자는 감정이 너무나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다.

다시 한번 뜯어보니, 차분함은 최근의 분노가 잠시 가라앉은 탓이었다. 다정함은 분노가 일상이 되기 이전부터 고수해온 태도였다.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느냐고?

초상화가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단정이 사실이 되느냐고?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시연이 이 여자를 그렸더라면 담으려 했을 진실이었다.



세상은 사실을 논했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란 건 중력이라든가, 숨을 쉬는 데 공기가 필요하다든가 정도 외에는 별로 없었다.

원래가 사람이란 의견 덩어리였다. 그리는 자도 그렇고 그림 당하는 자도 그랬다. 시연은 가끔 뇌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책을 읽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가 그런 것들이었다. 세상의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인간이 아무리 정신 승리해봐야, 우리의 ‘사실’이란 이미 우리의 감각 기관과 뇌에 의해 필터링 되고 해석된 결과물이라고.

슬퍼할 필요도, 자랑스러워할 필요도 없는 현상이다. 그저 그러하다고 한다.



여자가 말했다.

“누구…… 아.”



여자의 시선이 시연이 방금 있었던 극장으로 향했다. 벽에 거대한 공연용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실물 크기보다 두 배는 더 큰 시연이, 공연 때와 비슷한 강렬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귀신 같은 화랑 화장을 하고, 산발이 된 채 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정시연 씨 공연을 망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공연은 아까 전에 끝났으니까 괜찮아요.”



시연은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긴장을 풀었다.



“아까 하신 말 말이에요.”

“네.”



이걸 어떻게 물어야 하나. 인터넷 검색을 해 봤는데, 당신 남편 진짜 자살했냐고 물을 순 없지 않은가.



“이재원 씨랑 아는 사이예요?”



당연히 아는 사이이겠지만 전략적으로 택한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우리 남편 동업자였어요. 게다가 고등학교 동창이었죠.”



여자는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더니, 피식 웃었다. 그게 너무 힘없게 들려서 시연은 웃기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근데 날더러 남편처럼 입 다물고 뒤지래요.”

“이재원 씨가요?”

“아니요. 저 새끼는 직접 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럼 직접 얘기한 적은 없어요?”

“예전엔 있었죠. 아주 예전에. 이렇게 되기 전에. 저 사람이 자기 밥은 자기가 하고 자기 빨래도 자기가 하던 시절에.”



이제 대신해주는 사람을 고용한 모양이군.



“이제 눈에 보이는 거, 사람들한테 보여줄 거, 드러낼 거 말고는 아무것도 직접 안 해요. 다 그 뒷배가 알아서 하죠.”

“뒷배가 누군데요?”



여자는 웃었다.



“뒷배야 원래가 겉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보살펴주는 사람이니까, 나야 모르죠. 뒷배가 있다는 것만 알아요. 이재원 대신에 깡패를 고용해줄 만한 사람.”

“대기업?”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모른다는 뜻 같았다.



“걔네만 앞에 나서요. 깡패들.”

“걔네가 그쪽을 괴롭혀요?”

“죽으라잖아요. 경찰에 신고도 해요. 미친 여자라고. 명예 훼손이라고. 아무 근거도 없다고. 남편이 그냥 죽었다고. 나 같은 거랑 살기 싫어서.”



여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반반 하기로 했는데. 그게 계약이었어요. 내가 봤어요, 그 계약서를. 근데 이제 그 계약서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계약서요?”

“바디뷰티 1호점 차릴 때 쓴 계약서요. 내가 진짜 미친 건가 싶어요. 증거가 없어요. 자살이 아닌 것도 같아요.”

“죽인 거라고요?”

“아파트 짓는 데서 떨어져 죽었어요. 아무도 없었으니 일부러 떨어진 건지 밀어서 떨어진 건지도 몰라요. 근데 그이는 정말이지 죽을……”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기에 참 뭐해서 그랬으리라. 그렇게 말하면 죽은 사람들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처럼 들리고, 그걸 의미하려는 건 아닐 테니.



“혹시 어떤 아파트였어요?”



여자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듯이 시연을 째려보았지만, 말할 상대가 필요한 듯했다. 그래서 답했다.



“튼튼팰리스요.”



유레카. 새로 짓던 튼튼팰리스. 시연이 알아볼까 했던 그 매물. 몇 달 전 발생한 인명 사고로, 지금껏 공사를 재개하지 못하고 있는 그곳.



설마 일석이조였던 건가? 싱싱물산 사모의 애인인 이재원한테 불리할 만한 이 여자 남편은 죽여 없애고, 튼튼팰리스 공사는 늦추고?

그렇다면 싱싱물산 사장이 자기 부인 애인까지도 관리해준다는 뜻이 되나?

참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로구먼. 이 여자는 자기 남편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싱싱물산 부부는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슬퍼할지 궁금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요?”



여자는 시연을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떠나는 게 섭섭한 눈치였다.

시연은 폰을 내밀었다. 여자는 폰과 시연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받아들고는 번호를 입력했다. 폰을 돌려받은 시연은 한 손으로 여자 어깨를 지그시 다독였다.



“다음에 또 봐요.”

“다음 언제……”

“연락할게요, 조만간.”

“조만간 언제……”



최근 들어 남들이 무심코 던진 ‘조만간’들에 데인 모양이었다. 역시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시연 또한 이 여자의 말만 믿을 수는 없는 거였다. 상황이 심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의심만으로는 법정에서 받아들이는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싱싱과 상상은 마음을 놓고, 튼튼은 뭘 어쩌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밤바람이 불기에, 시연은 여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름이 완전히 가기 전에.”



마녀의 목소리며, 이재원이며, 싱싱물산까지.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이 난리를 끝내지 않으면 시연이 미칠 노릇이었으니까.



—#—#—#—#—#—



이벤트홀로 돌아갔을 땐 이미 의자며 무대가 반쯤 치워진 상태였다. 너무 늦었나 싶어 시연은 온 건물을 누비며 이재원을 찾아다녔다.

결국 그를 발견한 곳은 대기실 복도였다.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향해 시연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스태프들이 처음에는 ‘어?’ 하며 지켜보다, 시연이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내 눈치를 채고 마찬가지로 웃으며 앞서갔다.

이재원 스태프라지만 정시연 쪽에서 고용한 공연 기획사 사람들이라 그랬다. 좀 쑥덕거릴 수야 있겠지만, 그 정도쯤이야 시연도 익숙했다. 원래가 썸이란 악의적이든 호의적이든, 진짜든 아니든 관심의 중심이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만들고서도 짝짓기라는 주제를 벗어날 줄 모르는 거였다. 그래도 이들 쩐주는 일차적으로는 시연이니,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없는 소리를 지어내진 않겠지.

이재원도 선선히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복도가 고요해지자 시연이 아른거리는 검은 안개를 보며 물었다.



“시간 되면 술 한잔할래요?”



정상인이라면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라도 보이겠지. 그리고 그 기색을 시연은 눈치챌 수 있을 거야. 이재원의 얼굴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시연이 던진 말에 대한 반응, 그 변화를. 승낙하든, 승낙하지 않든.

승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시연에게 덫을 놓으려고 세웠던 계획이야 뭐가 됐든, 자살한 친구의 아내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여자가 소란을 피웠을 때는 시연이 빨리 떨어져 나가 줬으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재원의 답변은 아무 변화가 없는 안개구름만큼 의외였다.



“그러죠.”



오호라.

그러더니 이재원이 곧바로 물었다.



“어디서 볼까요?”

“청담동에 사는 거 맞죠?”

“네.”

“나 사는 데랑 가깝네요.”

“어디 사는데요?”

“서초동요. 그럼 가는 길에 들를게요.”

“네?”

“이재원 씨 사는 데요.”



이러면 아무리 그래도 정상인이라면 당황하겠지. 거절할 거야. 아니면 마지못해 승낙하거나.

이번에는 그 모든 감정이 이재원의 얼굴을 둘러싼 검은 화염 같은 구름에 스쳐 지나갔다. 평원에 안개가 얌전히 끼어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잠시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 변화 속에서 시연이 발견한 건 단 한 순간의 섬광 같은 번쩍임이었다. ‘이건 기회다’ 하는 듯한. ‘아까도 귀찮았는데 더 귀찮지 않으려면 빨리 치워버려야겠다’ 하는 듯한.

그리고 이건 아까 그 여자한테서 들은 말이 있어서 시연이 상상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그 귀찮은 동창 새끼처럼’이라고 추가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이 새끼 이거, 정말 일단 덫을 놓고 봐야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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